[뉴스] [경희의 유산] ⑭여덟 명의 선녀로 표현한 이상형
경희의 유산 ⑭ 『경희인상』
# 작년 9월부터 경희기록관은 우리신문과 함께 ‘경희 유산을 찾아서’를 연재한다. 서울, 국제, 광릉 캠퍼스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유산과 자연 유산은 물론 경희기록관이 소장하고 있는 우리 대학의 역사적 기록물, 경희만의 고유한 정신 유산들을 중심으로, 그들에 관한 역사적 사실,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 숨겨진 흥미로운 에피소드 등을 글과 사진으로 소개한다. 1차로 여름까지 연재를 진행하고, 1년간의 연재 결과를 바탕으로 내용과 형식을 보완해 2차 연재를 진행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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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교 20주년 경희인상 제막식이 열린 1969년 10월 30일, 수목이 우거진 현재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서울캠퍼스 교시탑을 지나 호텔관광대학 옆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미술대학으로 향하는 길, 왼쪽은 경희여중·고로 내려가는 길. 그 너머로 선동호가 펼쳐져 있다. 그곳에 여덟 명의 인물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을 한 청동빛 조형물이 서 있다. 흔히 ‘팔선녀상’이라 부르는 이 조각상의 정식 명칭은 ‘경희인상(慶熙人像)’. 1969년 개교 20주년을 기념해 경희학원 교직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성금으로 제작했다.
너비 6.6m, 높이 3.3m 규모의 이 조각상은, 무지개 모양의 아치 위에 여덟 명의 선녀가 한국 전통 악기를 하나씩 들고, 사이좋게 몸을 맞댄 채 줄지어 날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인물이 여덟 명인 것은 종합학원 체제인 경희학원의 교육기관이 당시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총 8개였기 때문이다. 설립자 조영식 박사의 아이디어를 미술대학 이종각 교수(당시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강사)가 형상화했다. 1969년 10월 30일 열린 경희인상 제막식에는 경희유치원 원생부터 대학원생까지 구성원 1만 5천여 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런데 조각상 속 인물을 왜 선녀(仙人)로 표현했을까? 제막식 당일 발간된 대학주보에는 그 이유가 비교적 상세히 소개돼 있다. “신통 자재하고, 변화 무변한, 즉 도통(道通)한 사람을 선인(仙人)이라고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호연지기의 기상으로 끊임없는 노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경희인들은 이제 이 상을 거울삼아 악한 마음을 없애고, 보다 더 아름답고 깨끗하고 선의에 가득 찬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적 미를 표현한 선녀의 모습을 통해 경희의 젊은 학생들이 지닌 꿈과 낭만을 나타내고, 여덟 명이 사이좋게 날아가는 모습은 경희인의 굳은 협동심을 표현하고자 했다. 또 푸른 하늘을 향해 웅비하는 모습은 한없이 뻗어가는 경희인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표현하는 동시에 경희인의 진취적 기상을 나타낸다.
지금은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처음 조각상이 세워질 당시 무지개 모양의 아치에는 문장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1949년 개교 이래 20여 년간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역사를 창조해 온 경희인들에게 줄곧 지표가 되었던 ‘이상은 천국을 낳고 의지는 역경을 극복한다’는 문구다. 경희인상 제막식이 열리던 날, 맑은 가을 하늘을 장식한 대형 애드벌룬과 오색 풍선 아래 경희의 캠퍼스는 그야말로 잔칫집이었다. 선동호에 조성된 폭포에 처음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낙류식(落流式)이 열렸고, 지금은 사라진 대운동장의 본부석 낙성식도 이날 오후 연이어 개최됐다.
선동호를 흐르던 분수 소리도, 드넓은 대운동장을 내려다보던 높은 본부석도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추억 속 존재가 되었지만, 경희인상에 새겨져 있던 그 문구는 ‘의지는 역경을 뚫고 협동은 기적을 낳는다’는 문구로 이어져 지금도 여전히 학생회관 입구 머릿돌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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