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경희의 유산] ⑩본관, 역사가 된 경희 건축물
# 9월부터 경희기록관은 우리신문과 함께 ‘경희 유산을 찾아서’를 연재한다. 서울, 국제, 광릉 캠퍼스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유산과 자연 유산은 물론 경희기록관이 소장하고 있는 우리 대학의 역사적 기록물, 경희만의 고유한 정신 유산들을 중심으로, 그들에 관한 역사적 사실,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 숨겨진 흥미로운 에피소드 등을 글과 사진으로 소개한다. 1차로 내년 여름까지 연재를 진행하고, 1년간의 연재 결과를 바탕으로 내용과 형식을 보완해 2차 연재를 진행할 계획이다.

▲ 완공일만 기준으로 하면 1954년 3월 22일에 완공된 신문방송국 건물이 가장 이르다.
서울캠퍼스 본관이 올해 완공 70주년을 맞는다. 지난 70년간 수많은 건물이 캠퍼스 곳곳에 세워졌지만, 여전히 본관은 역사적, 미학적, 상징적 의미에서 경희 최고의 건축물이다. 등용문을 통과해 교시탑을 지나서야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한 공간 배치 또한 본관이 경희의 중심임을 의미한다. 이렇듯 본관이 경희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이유는 시작부터 그렇게 구상되었기 때문이다.
본관 공사는 1953년 11월 24일 기공식을 거행하며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3년 동안 머물렀던 피난지 부산을 뒤로하고 회기동 일대를 교지로 정한 직후였다. 부산 임시교사 시절에 정립한 경희의 이상을 펼칠만한 교지를 선택한 후 처음 세우는 건물이자, 경희의 사명과 미래를 담아 기획하고 구현한 사실상 최초의 건물이 바로 본관이다. 그러므로 ‘본관 기공식’은 단지 하나의 건물을 세우는 행사가 아니었다. 경희의 새출발, 새역사를 알리는 ‘비전 선포식’이었다.
이러한 의미와 상징을 생각할 때 숭고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의 그리스 신전식(神殿式) 석조건물을 본관의 건축양식으로 선택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고황산에 일제강점기 때부터 사용되던 채석장이 있어 석재 공급에 문제가 없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웅장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훨씬 작았다. 본관은 1975년 증축 공사로 양쪽 날개가 확장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4층 높이 3,800평 규모의 웅장한 석조건물을 순수 우리 기술로 짓겠다는 계획은 당시 형편을 생각할 때 무모한 사업이 분명했다. 정부도 제대로 된 청사 하나 갖지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작고 가난한 신생 대학이 이런 웅장한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재정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수억이 드는 공사비에 비해 학교의 잔고는 불과 8만 환에 불과했다. 경험과 기술도 문제였다. 우리나라에서 석조건물 공사를 외국 기술의 도움 없이 시행한 사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초공사 기술이 부족해 공사가 지체되는 일이 빈번했다. 석재를 운반하는 수단이 없어 통나무와 수레 같은 원시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기중기가 마땅치 않아 공사장 근처로 운반된 석재를 인부들이 목도를 매고 한층 한층 쌓아 올려야 했다.
1956년 8월 20일 드디어 본관이 완공되었다. 경희의 역사와 함께 할 건물, 미래에 시선을 두고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경희의 정신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이후 경희인의 자랑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2018년 12월, 본관은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건축 양식과 미학적 측면에서 역사에 남을 문화재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제 본관은 경희를 넘어 대한민국의 역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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