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경희의 유산] ⑬‘세계적인 대학 건설’의 미래 비전 천명
경희의 유산 ⑬
『1954년 학장취임식 오디오 릴 테이프』
# 9월부터 경희기록관은 우리신문과 함께 ‘경희 유산을 찾아서’를 연재한다. 서울, 국제, 광릉 캠퍼스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유산과 자연 유산은 물론 경희기록관이 소장하고 있는 우리 대학의 역사적 기록물, 경희만의 고유한 정신 유산들을 중심으로, 그들에 관한 역사적 사실,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 숨겨진 흥미로운 에피소드 등을 글과 사진으로 소개한다. 1차로 내년 여름까지 연재를 진행하고, 1년간의 연재 결과를 바탕으로 내용과 형식을 보완해 2차 연재를 진행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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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장취임식 광경(1954.05.20.) (사진=경희기록관 제공)
우리 대학은 1950년대 피난지 부산 가교사 시절부터 대학의 중요 역사를 사진, 동영상, 음성 등 시청각 매체를 통해 기록하려는 의지가 남달랐다. 시간을 거슬러 이러한 시청각 기록물들을 처음 접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면, 그 놀라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 여운이 아직도 생생하다. 2004년 개교 55주년 기념식 이후 「경희역사사진전」 개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를 논의하기 위해 당시 매체센터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필름, 오디오 릴 테이프, 영화필름 등 수많은 대학 시청각 기록물들을 접하면서 우리 대학의 모든 역사를 영상화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토록 어렵게 제작된 영상물들이 여기저기 방치된 모습에 그저 안타까움만 더할 따름이었다. 그로부터 지난한 협의 과정을 거쳐 이 영상 기록물들의 원본은 중앙박물관을 거쳐 경희기록관으로 이관되었고, 부족하나마 대학의 소중한 역사 기록물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2015년 1월 27일, 여느 때처럼 먼지 수북한 수백 개의 오디오 릴 테이프를 정리하고 있었다. 당시 기록관에는 오디오 릴 테이프를 재생할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단지 보존 상태를 확인하고, 곰팡이와 쌓인 먼지를 털어내면서 릴 테이프의 생성 정보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그날도 평소처럼 오디오 릴 테이프가 담겨 있는 종이 케이스의 뚜껑을 열고, 테이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꺼내 들었다. 그 순간, 바닥에 ‘1954년 학장취임식’이라고 적힌 빛바랜 메모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우리 대학에서 가장 오래된 음성자료가 60여 년 만에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학장취임사가 녹음된 오디오 릴 테이프(2015년 발굴) (사진=경희기록관 제공)
“한국에 있어서의 유일한 대학, 한국에 있어서의 어떠한 특정 대학을 상대로 해서 그와 같은 대학을 만들고 싶다 하는 심정은 없습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것은 한국의 어느 대학보다도 동양적이요, 세계적으로 내놔서 굴지(屈指)가는 그 대학과 경쟁해야 되겠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처럼 빈한(貧寒)하고 국가 경제를 위시해서 모든 점이 약한 이러한 환경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저 사람들에 비해서 백 배, 천 배의 노력과 정성을 바치지 않아가지고는 아니 될 듯 생각합니다.”(1954년 학장취임사 중 일부 발췌)
1954년 5월 20일, 초라한 임시 가교사에서 조영식 박사의 학장취임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우리 대학은 4년제 단과대학(1955년 2월 28일 종합대학 승격)이었기 때문에 총장이 아닌 학장이었다.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로 이전(1954년 3월 24일)한 지 불과 2개월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 어쩌면 꿈같은 ‘세계적인 대학 건설’이라는 미래 비전을 천명한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운명이라는 것은 우리 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열정과 정성을 다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강한 의지도 동시에 표명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으로 대담하고 원대한 포부였다. 1954년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의 대참사에서 벗어난 지 1년도 채 안 된, 1인당 국민소득 70달러에 불과한 지구상 최빈국이었다. 당시 우리 대학은 국문학과와 영문학과 각 160명, 법률학과, 정치학과, 체육학과 각 240명 등 5개 학과에 전교생 1,040명 규모로, 캠퍼스에는 임시 가교사를 포함한 대학 본부, 대학원관 등 조그마한 건물 3채만 있는 미약한 신생 대학이었다. 그런 대학의 신임 학장이 ‘세계적인 대학 건설’을 천명했을 때, 그곳에 참석한 구성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절망 속에서도 미래의 희망을 보았을까? 아니면 단순히 취임사 해프닝 정도로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매우 진지한 모습으로 경청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캠퍼스 서울 이전과 개강을 이뤄낸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휴전협정 이후 피난지 부산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다른 대학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부러움에 좌절을 맛보았고, 그러면서도 결코 서울 이전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의지는 역경을 뚫고’와 같이, 1954년 3월 24일 서울 이전과 더불어 4월 15일 꿈에 그리던 역사적인 서울 첫 개강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5월 20일 발표된 ‘세계적인 대학 건설’이라는 비전은 불가능이라 여겼던 서울 이전을 달성한 것처럼 언젠가 반드시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과 미래 희망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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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식이 거행된 임시 가교사 모습(1954년) (사진=경희기록관 제공)
그렇다면 ‘세계적인 대학 건설’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아마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고뇌에 찬 캠퍼스 서울 이전 결정과 더불어 구체화 되었을 것이다. 특히 부지 선정 과정에서 그 의지는 더욱 굳어지고 강렬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캠퍼스가 위치한 고황산 자락을 학교 부지로 최종 선정한 이유는 바로 이곳이 ‘세계적인 대학원(大學園) 건설’에 매우 적합한 장소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부지 선정 이후 곧바로 고황산 중턱의 청운대에 올라 ‘천 년 이상 가는 본관’과 함께 세계적인 대학 캠퍼스 건설을 구상했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대학원(大學園)’의 기본 설계도인 우리 대학 최초의 마스터플랜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어쩌면 실현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는 세계적인 대학 건설을 이렇듯 강렬히 지향하고 주창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1964년 발표된 <개교 100주년 기념식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그 단서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즉, 우리가 세계적인 대학을 반드시 건설해야만 하는 목적은 무엇보다도 이것이 창학이념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편으로써, ‘지속적인 학술 발전을 통한 인류의 문화 향상과 복리증진,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 건설에 기여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72년이 지난 지금, 그 목표를 향한 우리의 노력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한 길로 달려왔다. 그 과정에서 당시의 비전이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다.
1954년 ‘세계적인 대학 건설’의 비전이 이제는 ‘Towards Global Eminence’로 확장되어 여전히 우리 대학의 미래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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