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발동한 긴급조치 9호 이후 학생운동은 엄청난 폭압에 직면했다. 경희대 학생운동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민주화 운동은 위축됐고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문 채 살지 않으면 누구든 범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많은 대학생이 유신체제에 분노해 힘겹게 민주화 운동의 싹을 틔워냈다.
정해랑(국문학 1977) 작가의 『회기동 연가』는 바로 그 시기, 1978년부터 1980년까지 3년 간의 경희대학교 학생운동사를 아카이빙한 결과다. 스무 명의 청춘을 정 작가의 기억으로 되짚어 책에 담았다. 첫 장면으로 1978년 9월 어느 날로 돌아간다.
오랜 침묵을 깨다
긴급조치 9호 이후 대학가에서는 소규모 시위만 벌어졌다. 그마저도 대학 교정에 사복형사와 전투경찰이 상주하면서 선언문 첫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시위 주동자를 체포하기 일쑤였다. 정 작가는 “그런 걸 우리는 ‘학 사건’이라 불렀다”고 회상했다. ‘학 사건’은 시위 주동자가 ‘학우여!’를 외치려고 학! 하는 순간 입을 틀어막힌 채 끌려가는 것을 가리킨다.
정 작가 기억에 따르면, 조직적인 학생운동의 조짐이 보였던 것은 1978년 9월 하순이었다. 긴급조치 9호 이후 얼어붙은 교정에서는 3년 가까이 어떤 시위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석태(영문학 1976)가 총대를 멨고, 대학주보 기자 신명식(사학 1976)과 ‘백단’ 학회 신용남(사학 1977)이 각 문리대, 정경대, 대운동장에 서서 교정의 오랜 침묵을 깨는 시위를 벌였다.
거사일은 2학년 학생들이 교련 행군을 하던 날이었다. 교련복을 입은 신용남이 M1 소총을 집어던지며 “유신헌법 철폐하라!” 하고 구호를 외쳤다. 그런데 대열 사이사이에 있던 자들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신용남의 머리채를 낚아채고 팔을 비틀어서 끌고 갔다. 정 작가는 “거사 직전 같은 국문과 동기가 ‘신용남이 오늘 시위를 할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그가 소리를 치면 따라서 하라고 했지만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는 말이었다”고 떠올렸다. 이어 “신용남은 아무도 호응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개 같이 끌려갔다”고 돌아봤다.
하석태와 신명식은 그 자리에서 잡히지 않았지만 노천극장과 도로에 유신철폐, 독재타도, 민주 등의 글씨를 크게 쓰는 등 신출귀몰 학교를 드나들며 정보경찰을 괴롭혔다. 하지만 오래 버티진 못했다. 결국 세 사람 모두 성동구치소에 구속됐다.
이 시위는 당시 현실에 비판적이던 학생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학내 분위기를 바꾸게 한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신용남이 체포되던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한 정 작가 또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러가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며 “사흘을 누워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이후 정 작가는 운동권이 됐다.

▲『회기동 연가』를 집필한 정해랑 작가는 경희문학회 회장을 하며 문인의 꿈을 꾸었으나 유신체제에 분노하여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사진=이수연 기자)
교문 밖 진출에 성공하다
한 번 붙은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캠퍼스는 뒤숭숭했고, 술자리에서 시국을 성토하거나 이번 시위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었다. ‘경희대 학생운동을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를 함께 논의하는 비합법 조직이 이때 생겨났다. 그렇게 1979년이 되고, 조직은 신입생을 모집하며 더욱 몸집을 키워갔다. 이들에겐 재판 방청도 주요 활동이었는데, 옥중 투쟁을 하던 하석태 등을 보며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책에는 투쟁사뿐 아니라, 한 인간의 두려움, 갈등, 흔들림까지 숨김없이 담겨 있다. 당시 비합법 조직에 속한 이들은 학교 여기저기에 유인물을 뿌리는 실제 행동을 단행하기도 했는데, 두려움으로 인해 조직을 이탈한 인원도 상당했다. 정 작가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아 종교적으로든 사명감으로든 자기 결단을 해야 했고 사실 많은 인원이 중간에 그만뒀다”며 “나조차도 도중에 갈등하던 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부모님이 받으셨던 고통을 생각하면 내 행동이 정당하다고 해서 부모님께 죄송하지 않은 건 아니다”는 소회를 남겼다.
모두의 기억에 따르면, 1979년 봄에는 시위가 없었다. 다른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2학기가 되면서 교정은 한층 더 우울한 풍경이었다. 그러다 10월 26일 박정희가 피살되면서 정권의 종말은 갑자기 닥쳤다. 당시 정 작가는 시국비판 유인물을 뿌렸다는 이유로 성동구치소에 갇힌 지 두 달 차였는데, 이 사태 이후 긴급조치가 해제되며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나기도 했다. ‘서울의 봄’이 예견되면서 학생들은 학원민주화를 추진하는 한편 총학생회를 부활하려는 움직임을 만들어 나갔다. 우리학교에도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됐고, 1980년 4월부터 수십 일 동안 격렬한 학내 투쟁이 이어졌다.
5월에 들어서면서는 학내 투쟁이 시국 시위로 전환됐다. 전국 각지 대학에서 거의 모든 학생이 교문 밖 진출을 시도했다. 정 작가는 “서울 시내를 덮을 정도의 인원이라 경찰도 진압을 포기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시위가 절정에 이르렀던 15일, 학생들은 청량리를 지나 청계천을 거쳐 서울역으로 갔다. 경희대는 남대문 쪽으로 전진했다. 날아오는 최루탄에 눈이 쓰리고 기침이 나서 고통스러웠지만 오히려 전투의지가 차올라 보도블록을 깨서 던지며 싸웠다. 날이 저문 뒤 해산을 결의했다는 전달이 왔고 학생들은 대오를 지어 학교로 돌아왔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었다. 이틀이 지난 뒤인 5월 17일 신군부가 계엄령을 확대하면서 그렇게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전두환 정권 이후 최초 시위를 하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고 대학이 개강한 뒤 첫번째 시위가 경희대에서 벌어졌다. 당시 경희대는 학내 시위로 이미 4월 1일부터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정 작가는 “수업 일수가 가장 적은 경희대가 가장 먼저 개강하게 됐던 상황에서 다른 학교가 우리가 벌일 시위를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9월 9일 시위 배경을 설명했다.
거사 당일은 맑고 화창했다. 문리대 앞에서 정형서가 유인물을 뿌리며 구호를 외치자, 순식간에 어디선가 형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때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함께 있던 김경이 면도칼로 자기 손목을 그은 것이었다. 이건 함께 시위를 한 동료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곧이어 피가 흘러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김경은 노천극장이 있는 스탠드 위에 서서 유인물을 읽기 시작했다. 의대생이었던 정형서가 곧바로 달려가서 왼쪽 어깨 밑 동맥을 꽉 쥐고 그런 김경을 부축했다. 정 작가는 “경찰도 피를 흘리는 김경을 잡아가지 못하고 멈칫했다”며 “당시 김경을 끌어내리거나 했다면 주위를 둘러싼 학생들이 가만 안 있었을 분위기였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김경은 앞뒤로 빽빽한 유인물을 끝내 다 읽을 수 있었다.
시위는 언론 통제로 일반 시민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들은 입으로 입으로 그 소식을 전했고, 개강을 맞이한 대학가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후 한신대, 연세대, 고려대, 동국대 등에서도 연이어 시위가 벌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시작부터 강력한 저항에 맞닥뜨리게 됐고, 그 시발점이 바로 우리학교 학생들이었다.
회기동에서 불린 민주주의의 노래
책에서 다룬 비합법 조직이 경희대 학생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때부터 조직적인 학생운동이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정 작가는 “우리 시대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역사가 묻혀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실제로 책에서 소개한 스무 명의 인물 중 세 명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소개된 이야기는 부모님과 형제들의 가슴에 못을 박은 그런 사연들이다. 학생운동에 나섰던 이들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정 작가 역시 황순원 선생과 조병화 시인의 영향을 받아 우리학교 국문과에 진학했고 문학을 꿈꾸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수많은 청춘과 마찬가지로 저항의 길에 들어섰다. 책 속 인물들 또한 같은 생각으로 그 길을 걸었다.
『회기동 연가』는 교문 앞에서, 강의실에서,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노래했던 ‘옛 이야기’다. 돈도 명예도 이름도 없이 싸웠던 이들의 웃음과 두려움, 그리고 선택의 순간들까지, 그 모든 기억을 품은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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