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창간 70주년-나는 학생기자다⑤] 3인 편집장 생존기, “그 시절 우리는 버텨야 했다” 사회에서도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 돼 있어
57기 박설희(법학 2008)
58기 권오은(언론정보학 2009)
59기 국주연(언론정보학 2010)
#대학주보가 가장 어렵던 시절, 고군분투하며 위기를 넘긴 세 명의 편집장이 있었다. 박설희(57기), 권오은(58기), 국주연(59기)이 그 주인공이다. 뉴욕타임스 좇아가다 가랑이 찢어졌다지만, 빠듯한 인원으로도 자타 공인 대학주보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전통적인 대학주보 기자상'으로 불리는 마지막 세대였던 이들을 회기동으로 다시 소환했다. 지난 4월 30일, 한자리에 모인 세 사람은 그 시절을 꺼내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시절처럼 마음이 단단해졌다.
유례없는 위기에 봉착하다
2009년 9월, 막 편집장으로 부임한 57기 박설희(법학 2008)에게 유례없는 위기 상황이 닥쳤다. 동기 22명이 죄다 나간 탓이었다. 박설희는 정기자였던 58기 권오은(언론정보학 2009)과 김채원(골프경영학 2009) 단둘을 데리고 이제 대학주보를 책임져야 했다. 신문을 내기에는 빠듯한 숫자였다. 원래라면 팀장이든 선배든 누군가가 한 번쯤은 기사를 다듬고 넘겼을 테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임기를 끝낸 OB 선배였던 김보라(대학주보 56기)가 ‘날 것’ 상태의 권오은의 글을 교정하다 분노를 참지 못할 정도였다. 권오은은 “새벽이었는데 누나가 ‘편집실 갈 테니까 너 목 닦고 기다려’ 그랬어요. 근데 후문 평화의전당 언덕을 넘어오면서 화가 좀 풀렸다더라고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박설희가 1만 자를 쓰면, 권오은은 8천 자쯤 썼다. 한 사람당 지면 3~4개를 책임진 셈이다. 아이템은 늘 부족했고, 회에 중엔 “우리가 불을 지를까?”, “아니, 고성방가라도 질러보자”는 농담들이 오갔다. 일요일만큼은 쉬자 싶었지만, 그날조차 ‘네이트온’ 회의가 열렸다. 이유는 하나였다. “내일 말도 안 되는 아이템 가져올까 봐 미리 검열하려고.”
가차 없는 박설희가 가장 두려웠던 건, 권오은과 김채원이 대학주보를 그만두는 일이었다. 남은 세 명 중 누구 하나라도 빠진다면, 더 이상 신문을 낼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집에 가서 언니랑 먹어”, “집에 가서 동생이랑 부모님이랑 먹어.“ 박설희가 수시로 손에 쥐여 보낸 도넛 한 박스는 ‘너를 걱정하고 있으니 이곳에 남아달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위태로운 대학주보를 떠받치고 있는 두 사람에 대한 절실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권오은은 “우리의 어려움을 받아주고 이러진 않았지만 정이 많았다”며, ‘다정’했지만 또 ‘다감’하지는 않았던 편집장 박설희를 떠올렸다.
▲ 세대불문 누구와도 잘 지내는 사회성, 논리가 바탕이 된 기획력, 상황 판단 능력, 그리고 무한한 회의 체력이야말로 이들이 가진 진짜 무기였다. 왼쪽부터 58기 권오은, 57기 박설희, 59기 국주연. (사진=이지수 기자)
뉴욕타임스 좇다 가랑이 찢어지다
고된 한 학기를 버텨낸 뒤 59기 수습기자들이 들어왔고, 그중 한 명이 국주연(언론정보학 2010)이었다. 숨 좀 돌리려는 찰나, 또 다른 위기가 닥쳤다. 신문방송국 행정실 김종현(대학주보 36기)이 <뉴욕타임스 혁신 보고서>를 읽은 것이 발단이었다. ‘채널 다변화’와 “맞춤형 콘텐츠’, 김종현은 “이게 우리가 갈 길이다”를 외쳤고, 권오은은 “거기서부터 망한거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현역 기자단이 편집장을 중심으로 매주 발행되는 신문 제작에 매달리고 있었다면, 행정실의 편집간사와 조교들, 즉 대학주보 OB들은 그 외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있었다. 조교였던 김세익(대학주보 51기)은 “뉴욕타임스나 가디언을 참고해서 현역 기자단과 인사이트를 나누려 했던 시기였다”며 “워크숍이나 세미나마다 자료 뭉치를 통째로 던져주곤 했다”고 말했다. 김종현과 편집장 권오은 사이에서 OB들 역시 기자 못지않게 ‘혹사’ 당했던 시절. 그 속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물건이 있으니, 바로 간사 김주애(대학주보 47기)의 ‘검정 노트’다. 모든 게 담겨 있던 그 노트는 일종의 비밀 병기이자 공포의 상징이었다. 김세익은 “우리가 장기적으로 대응해야 되는 온갖 게 다 들어 있으니까 호시탐탐 불태울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모바일로 저널리즘이 옮겨간다는 게 도대체 어떤 형태인지 아무런 롤 모델이 없는 상태에서도 권오은이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 어처구니없는 시스템을 성실하게 잘 굴렸다. 매주 신문은 멀쩡히 만들면서도, 온라인 전용 기사를 매일 마감했다. 카드 뉴스를 만들었고 페이스북 중심으로 SNS를 관리했다. 동시에 분기별 매거진까지 뚝딱뚝딱 만들어냈다. 하지만 ‘굴린다’는 건 곧 ‘부딪힌다’는 뜻이었다. 페이스북에 ‘학과별 학점 평균’을 주제로 카드 뉴스를 올린 어느 날이었다. “‘학점 폭격’이라는 말에 진짜 전투기 폭격 사진을 넣었는데, 어떤 댓글이 ‘이걸 이렇게 무감각하게 쓰는 게 너무 놀랍다’는 거였어요.” 권오은이 콘텐츠 제작의 무게를 다시 실감한 순간이었다.
고생 끝에 반응은 따라왔다. 대학주보 홈페이지 연간 트래픽은 120만을 찍었다. 당시로서는 의미 있는 성과였다. 타 대학 학보사에서 대학주보를 청해 운영 비결을 듣겠다고 해서 권오은이 강연도 다녔다. 김세익은 “대학주보가 SNS를 운영하면서 홈페이지도 따로 운영하고 지면도 내고 동시에 매거진도 냈기 때문에 밖에서 봤을 때는 활발하게 여러 매체를 아우르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고 전했다. 박설희는 “비 올 때만 우산 대용으로 신문이 동난다는 자조적인 분위기에서 어느 순간 우리 기사에 반응이 오고, 읽히는 게 느껴졌다”라며 그 시절의 변화를 떠올렸다.
시어머니 셋에 시누이 일곱
박설희에서 권오은으로, 그리고 국주연으로. 편집장 바통은 그렇게 이어졌다. 이전보다 기자 수도 늘었고, 전임 편집장들에게 수련받은 기자들을 데리고 탄탄하게 조직을 운영하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국주연의 시절은 또 다른 종류의 고단함이었다. 전임 편집장 둘은 여전히 재학 OB로 남아 대학주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2층 행정실에도 OB들이 남아있었다. 든든했지만 부담스러웠다. 뚜렷한 족적을 남긴 영웅들의 다음 타자가 된다는 것, 그 무게는 컸다. 김세익은 “그 시기 2층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대학주보의 영향력이 약화된다거나 비리비리해지는 이런 것들을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며 “주연이가 나름대로 편집장으로서 만들어가고 싶은 비전이나 청사진이 있었을 텐데 여러 관계 설정에서 힘들었을 것이다”고 회상했다.
레이아웃을 그리고 있던 어느 날, 문이 벌컥 열리더니 권오은이 들어왔다. “야, 너는 레이아웃 맨날 이렇게밖에 못 그려?” 마침내 국주연이 터지고 말았다. “보고 배운 게 이거라서 그래요!” 그 말은 행정실까지 닿았고, “이렇게나 널 도와주는 선배한테 그럴 수 있냐”는 꾸중이 돌아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주연이 서럽게 눈물을 쏟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레이아웃은 원래 권오은이 만든 방식이었다. 권오은은 국주연에게 새로운 방식의 변화를 기대했고, 무엇보다 국주연이라면 충분히 해낼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국주연은 해냈다. 권오은보다 더 유연했고, 박설희보다 더 따뜻했다. 전임자들이 씨를 뿌리고 물을 준 그 밭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꽃을 피워냈다. 김세익은 “주연이는 정말 본인이 어떻게 보면 증명을 하면서 나아간 편집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설희는 “주연이는 진짜 애썼다”며 “시어머니가 세 분이고 시누이가 일곱 명 있는 집에 시집간 기분이었을거다”며 국주연의 지난날을 대변했다.
대학주보에서 배운 ‘버티는 법’
시간이 흘러 박설희는 졸업했고, 권오은은 군 복무를 마쳤으며, 국주연은 일본에서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사이 한 기수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번엔 62기였다. 소식을 들은 국주연은 조용히 편집팀장을 맡았고, 권오은은 다시 편집장으로 복귀했다. 대학주보는 또 한 번의 위기에서 중심을 잡았다.
이들은 대학주보에서 ‘버티는 법’을 배웠다. 상황이 아무리 엉망이어도 신문은 나와야 했고, 마감은 지켜져야 했다. 그렇게 매주 살아남다 보니, 사회에서도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이 돼있었다. 글쓰기나 편집 기술은 부차적이었다. 세대불문 누구와도 잘 지내는 사회성, 논리가 바탕이 된 기획력, 상황 판단 능력, 그리고 무한한 회의 체력이야말로 이들이 가진 진짜 무기였다. 박설희는 “주제를 주제답게 다루는 훈련을 3년간 했으니 회사 가면 기획안 제일 잘 쓰는 사람 되는 거다”라며 웃음을 보였다.
말 그대로 박설희는 졸업 후 교육 시장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고 권오은은 기자로 사회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눈물 한 바가지 흘린 국주연은 선배들의 '가혹한 작업지시'가 못내 부당했었던지 노무사로 기업 인사담당자가 됐다. 다정하지만 다감하진 않았던 묘한 설희, 미운데 밉지 않은 스파르타 오은, 그리고 그 둘을 보며 자기만의 단단함을 길러낸 주연. 세 사람의 손끝에서 대학주보는 위기마다 살아났다. 힘들었지만 끝내 버텨낸 그 시간들이, 여전히 이들을 단단하게 지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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