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70주년
나는 주간교수다④ - 최상진(국어국문학·1996~1999년 주간)
# 창간 70주년을 맞아 대학주보는 역대 주간 교수를 만나 그들이 겪은 대학과 사회의 현실, 덜 다듬어진 학생기자들을 어루만져온 그 시간을 들어보았다. 네 번째 순서는 섹션 도입과 간지 창간 등 편집 혁신을 주도한 최상진 전 주간의 이야기다.
혼잡함과 자유로움 공존하던 곳
창의·도전의 바람이 불다
1996년 3월, 국어국문학과 최상진 교수에게 신문방송국장 제안이 들어왔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보직 교수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근심 어린 표정을 한 최 교수가 대학주보 편집실 문을 열었다.
“이게 쓰레기통이지, 사람 사는 데냐!” 문을 열고 마주한 편집실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들어오는 입구에서부터 양쪽으로 쌓인 신문 더미, 평평한 곳이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든 널브러져 있던 원고지, 정리되지 않은 재떨이와 꾸역꾸역 천장을 메우고 있는 담배 연기까지.
대학의소리방송국(VOU) 공간을 보니 깨끗해서 더 기가 찼다. 44기 공광섭(토목공학 1995) 동문은 “국장실도 교수님 책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자가 사용했기 때문에 지저분했다”며 “마감일에는 국장실 소파나 바닥에서 잠도 많이 잤다”고 회상했다.
이렇듯 혼잡함과 자유로움이 공존했던 이 공간에서, 최 교수와 기자들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변화의 바람이 시작됐다.
섹션 도입과 제호 변경
가치와 정체성 새롭게 선언
회색조로 가득한 1면, 촌스러운 제호, 어딘가 과거에 머문 듯한 편집 방식까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아니, 혁신이 필요했다. 그렇게 대학신문 최초로 1면과 8면에 컬러면이 도입됐다. 컬러가 중앙일간지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시절, 그 흐름을 대학 언론에 과감히 끌어들인 것이다.
섹션 도입도 함께 추진됐다. 중구난방 배치되던 뉴스를 보도, 여론, 사회, 문화, 오피니언 등 명확한 구획을 설정해 독자들이 더 쉽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신문의 얼굴인 ‘제호’도 바꿨다. 대학주보가 나아갈 방향, 그 가치와 정체성을 새롭게 선언하는 일이었다.
기자들은 도발적으로 응수했다. 1997년 5월 12일, 대학주보 창간 42주년에 맞춰 ‘이왕 바꾸는 거, 제대로 흔들어 보자’는 듯, 이름부터 ‘프리스타일’인 간지를 창간했다. 기존 신문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44기 김연의(무역학 1995) 동문이 상의를 탈의하고 얼굴 반쪽만 메이크업을 한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사진을 창간호 표지로 장식했다.
▲ 1997년 5월 12일자 신문. 45기 김연의 동문이 상의 탈의를 하고 얼굴 반쪽만 메이크업을 한 채 정면을 응시한 사진이 창간호 표지였다. (사진=대학주보 DB)
45기 김동혁(생물학·신문방송학 1996) 동문은 “프리스타일의 핵심 키워드는 ‘실험 정신’이었다”며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대학 문화를 바라보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프리스타일은 대학신문 최초로, 규정화된 본지 이외에 자유롭게 대학생 문화를 지면화 한 시도였다. 정해진 형식도, 정답도 없었다. 글보다 이미지가 먼저 말을 걸었고, 딱딱한 논조보다 대학생의 진짜 목소리가 중심이었다.
최 교수는 부총장실에 불려 갔던 하루를 소개했다. “지난번 나간 신문으로 또 한 소리 듣겠구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한국일보 부사장이십니다.” 부총장이 조용히 소개했다. 그 인사는, 대학주보 한 부를 들고 있었다. “요즘 대학신문이 이렇게도 나옵니까?” 그 짧은 찬사가 긴 시간 고민하고 흔들리던 최 교수의 마음에 단단한 울림을 남겼다. “우리가 맞게 가고 있다.”
늘 학생 편에 서던 주간
‘지켜야 할 선’ 경계하기도
꼬박 1년이 지나, 새해가 밝았다. 신년호 1면엔 당연히 밝고 희망적인 이미지가 실릴 줄 알았다. 그런데 기자들이 들고 온 건 검은 바탕에 섬뜩한 해골이 그려진 사진 한 장이었다. 당황을 넘어 당혹에 가까웠다. ‘다시 생각해보라’며 단박에 반대했지만, 기자들은 진지했고 그 안에 담긴 고민과 메시지 역시 가볍지 않았다.
▲ 1997년 1월 1일자 신문. 신년호에는 밝은 이미지가 아닌 섬뜩한 해골 사진이 자리했다. 사진 아래로는 조영식 학원장의 신년사가 배치돼 있다. (사진=대학주보 DB)
결국 실리게 된 ‘기막힌 신년호’는 예상대로 교무회의에서도 화제였다. 새해 벽두부터 우중충한 1면에 대한 질타가 이어졌다. 그날, 최 교수가 당시 편집장이었던 44기 공광섭 동문을 밖으로 불렀다. “그래도 신년호인데 해골은 너무했다.” 허공을 바라보며 조용히, 단 한마디만 남겼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늘 학생들 편에 서 있던 그였지만, 학생의 ‘자유’와 ‘지켜야 할 선’ 사이에서 고민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한다. 최 교수는 늦은 밤 조판 막바지에 올라온 사설 원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관련해 타 대학신문이 쓴 도발적인 사설에 동조하는 글이었다. “이건 아니다. 이대로 내보내면 너희도, 나도 전부 잡혀간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학생들을 감싸던 방패가 처음으로 흔들린 순간이었다.
결국 신문 발행은 전면 중단됐다. 다음 날 아침, 편집실로 ‘신문이 왜 안 나왔냐’며 서울신문 기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1학년 수습기자가 ‘사설 문제로 신문이 나가지 못했다’는 말을 무심코 전하고 말았다. 발행조차 되지 않은 사설의 뒷이야기가 전국 일간지를 통해 퍼져나갔다.
다행히 별다른 사고 없이 지나갔지만, 고뇌와 긴장 속에서 마음을 졸인 그 치열한 순간은 최 교수에게 지금껏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됐다.
‘동행’을 택한 주간
기자들과 한 시대 문을 열다
▲ 퇴직 후 진짜 농부가 돼 포도밭을 일구고 있는 최상진 전 주간 (사진=김규연 기자)
45기 김동혁 동문은 “함께 지내보니, 털털하고 소박한 농부 같은 분이었다”고 그를 떠올렸다. 45기 강남이 (물리학 1996) 동문은 “권위라는 걸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항상 학생들 편에 서 계셨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기억 속 그는 ‘지도’보다는 ‘동행’을 택했던 사람이었다.
아이템 하나를 두고 밤새도록 이어진 편집 회의는 일상이었다. 기자들이 본인들에게 ‘회의주의자’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하지만 틀을 깨는 새로운 방식처럼 무엇이든 시도해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자들은 충분히 들떴다. 변화는 모두의 에너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최상진 전 주간은 퇴직 이후 진짜 농부가 되어 포도밭을 일구고 있다. “이런 거지같은 대학주보. 징그러운 대학주보. 아주 꼴도 뵈기 싫어요” ‘징그럽다’는 말은 결국 ‘지독하게 정들었다’는 말이었다. “젊은이는 약간의 반항을 품고 있어야 한다고, 체제에 질문을 던지는 태도가 젊음의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그 징그러운 대학주보는 그래서 지금도 그의 마음속에 가장 오래 남은 젊음이다. 그리고 그 젊음이 있었기에, 대학주보는 한 시대의 문을 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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