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주보 47기
김낙연, 김주애, 류호명, 서해동, 서효다, 윤보훈, 이주호, 이승재, 채민선
#대학주보 47기(1998년도 신입생)는 개성 강하고 독특한 녀석들의 집합체였다. 9명 모두가 지지 않는 성격에, 각자 뚜렷한 색깔을 지녔고, 한자리에만 모이면 에너지가 폭발했다. 반항심도 세고 말투도 거칠어 선배들의 눈총을 사곤 했지만, 그 어느 기수보다 일을 제일 많이 해 어딘가 짠한 이들이었다. 기수별 전통인 ‘냉면그릇 의리주’를 마실 땐, 모두가 말술이라 걱정이 없었다. 98년 개교 50주년을 맞이해 대학신문 중 최대 면수인 52면을 발행한 것과 88올림픽에 버금갈 99 NGO올림픽이라는 찬사를 받은 ‘서울 NGO세계대회’의 일간지 발행이 모두 이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기자 활동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그 시절의 열정으로, 대학주보 지면에 다시 그들을 초대한다.(졸업 후 생업으로 전체 모임이 어려웠지만 지난 3월 26일 저녁 모처럼 9명의 동기 전원이 모여 그때를 회고했다)
그들, 면접부터 남달랐다
대학주보 70년 역사를 통틀어봐도, 신입기자 면접부터 47기는 남달랐다. 김주애(지리학)와 서해동(정경대 경영학)의 기억 속 대학주보 면접은 필기고사, 정기자 면접, 부장단 면접뿐 아니라 대기공간에서도 OB선배들이 질문공세를 벌였고, ‘최종보스 면접’같았던 국장방에 들어가니 최상진 교수(국문학)를 비롯한 간사, 조교들이 앉아서 ‘그 불쌍한 수습기자 한 명을 두고 일종의 압박 면접'을 하는 분위기였다. 윤보훈(생명자원과학부)은 VOU 원서를 내러 갔다 1층에서 우연히 만난 44기 오세윤 OB선배의 “여기가 더 좋다”는 말에 낚여 대학주보에 지원하게 됐다.
나이나 학번은 중요하지 않았다. 위계는 오직 ‘기수’로 정해졌고, 그 질서엔 절대 복종이 원칙이었다. 그것이 47기가 처음 마주한 대학주보의 분위기였다. 동기 중에는 재수한 김낙연(섬유화학산업공학부)을 제외하고는 다 현역이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45기 선배가 46기 삼수한 선배보다 어렸는데도 거리낌없이 말을 놓고 일을 시키는 대학주보만의 룰에 적응해야 했다. 신문 제작을 위해 개인 활동은 철저히 통제됐다. “집에 불이 나서 방 하나가 홀랑 다 탔다고 하는데요!” 김낙연이 다급하게 말하자 당시 편집장이던 45기 강남이(물리학 1996)가 “마감 안 하면 집에 못간다”고 말했다. 김낙연은 원고를 다 마감하고 나서야 집으로 뛰어갈 수 있었다.
▲ 왼쪽부터 서해동, 김주애, 채민선, 이승재, 김낙연, 윤보훈, 류호명, 서효다 동문. 열아홉 청춘을 지독하게도 열정적으로 살아냈다. (사진=류호명 동문 제공)
학업과 신문 병행, 어렵지 않았다
편집실은 기자들이 먹고자는 ‘집’이었다. 매일 출근에, 합숙, 세미나, 기획 회의, 평가 등 1년 내내 함께 붙어있는 것이 일상이었다. “학업과 신문 제작 병행이 어렵지 않았느냐고? 어렵지 않았다. 학업을 안 했으니까.” 47기 9명의 의견이 모두 일치했다. 이주호(자연과학부)는 “학점 3.0 근처만 되면 무조건 기수 중 1등을 차지했고, 대부분이 1~2점대였다”고 증언했다. 그마저도 선배들은 학사 경고도 많이 받던 시절이었다고도 덧붙였다. 9명 모두 현역 기자 생활이 끝난 후 계절학기와 남은 학기를 이용해 그 많은 학점을 겨우 채워 졸업했다.
당시 기자들의 일주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월요일은 수원과 회기에서 격주로 편집 회의가 있었고 끝나면 술을 먹었다.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취재가 주된 일과였고, 그 끝은 역시 음주였다. 금요일 밤에 시작한 원고마감은 토요일 새벽까지 이어졌고, 주간지에서 사진을 찾는 등 다음 날 조판을 준비했다. 대망의 토요일, 이른 오전 조판소로 향해 다음날인 일요일 새벽 2~3시까지 조판을 이어갔다. 이승재(서양학부)는 “조판이 하도 늦게 끝나니까 편집장이 바뀔 때마다 목표가 ‘조판 시간을 앞당기겠습니다’, ‘조판을 자정 전에는 끝내겠습니다’라고 했다”고 전했다. 기자들은 조판이 끝나면 일요일 오전까지 또 술을 먹었다. 류호명(생명자원과학부)는 “그렇게 집에 들어오면 <일요일 일요일밤에> 예능 프로가 방송되는 저녁 6시쯤 일어나는게 루틴이었다”고 말했다. 저녁에 일어난 기자들은 학교로 가서 단과대별로 신문을 배포했다. 그러고 또 술을 마시러 갔다. 47기들의 일주일은 조판과 술이 뒤섞인, 그 자체로 하나의 리듬을 이룬 생활이었다.
당시 서울캠은 신문 배포를 도와주는 직원이 있었지만, 국제캠은 기자들이 직접 신문 배포를 해야 했다. 총학생회 선거를 두고 말이 많던 상황이라 “학생들이 보면 안 될 기사가 나올 것 같으니 신문을 없애자”는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었다. “누군가 신문을 가져가면 넌 그걸 찍어” 신문 배포대를 사수하며 ‘보초’역을 자처한 김주애가 김낙연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정말로 신문을 가져가려는 일당이 나타났고 이걸 몰래 찍으려던 김낙연이 실수로 플래시를 터뜨리고 말았다. 걸린 거였다. 사진기를 꼭 움켜쥔 김낙연이 그 길로 재빠르게 도망갔다.
일 복이 터졌다
개교 50주년을 맞이해 무려 ‘52면’ 특집호를 제작한다고 했다. 당시 대학신문 중 한양대의 최대면수가 40면이었는데 이를 뛰어넘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현역 기자 뿐만 아니라 OB와 조교, 간사가 모두 동참해서 기획부터 발행까지 책임을 졌다. 기획만 자그마치 1달, 조판은 3일이 걸렸다. 모두가 집에 가지 못하고 신문에만 매달려 고생했던 경험이었다. 이승재는“총동문회장을 인터뷰하는 면이 있었는데 조판 시기에 돌아가셔서 다른 인물로 대체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황당했던 비화를 전했다.
1999년 10월, 체조경기장 내에서 ‘서울 NGO 세계대회’가 우리학교와 중앙일보의 공동 주최로 열렸다. 당시 주간이었던 최 교수가 대회 기간 동안 일간지를 만들자고 기자들에게 얘기하자 “뭐 이딴 걸 만드냐”고 난리가 났다. 이번에는 아예 단체 수업결강 협조전을 만들어, 학생 기자들에게 ‘학교에 가지 말고 올림픽공원으로 출근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김주애는 “학생에게 학교에 가지 말라니, 이게 뭔 소리인가 싶었다”고 그날을 떠올렸다. 일주일 정도의 대회 기간 동안 취재팀과 편집팀이 밤을 새며 일간지 ‘NGO 데일리’를 만들어냈다. 서해동이 흑인 백인 황인종 3명이 대화하는 모습을 포착해 1면에 올리면서 47기의 활약이 돋보이기도 했다.
방학마다 떠났던 세미나에서 웃픈 일들이 참 많았다. 당시 세미나는 2박 3일동안 설악산이나 지리산 등을 올랐다가 바닷가 쪽으로 하산해 마지막 밤을 지내는 형식이었다. 그 세미나 기간동안 항상 술은 과하게 개입됐고 선후배 간의 기강을 잡는 얼차려가 이뤄졌다. 47기 사이에서 아직도 회자되는 서효다(사회과학부)의 기행은 이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뜬금없이 윗 기수 선배가 “너희 너무 친한 거 아니냐”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갑자기 일렬로 서보라고 하더니, 뺨을 한 대씩 때리는 거예요. 승재가 그만하라고 해서 멈추긴 했는데..” 이광호(자연과학부)가 말끝을 흐렸다. 이후 상황은 이랬다. 분노가 극에 달한 서효다가 화장실 변기를 주먹으로 내리쳤고, 그 충격에 변기는 산산조각 났다고 한다.
믿기지 않는 열정이었다
설악산으로 떠난 3학년 여름 세미나 중, 조교는 편집장 이승재를 붙잡고 조용히 말했다. “너, 그만두는 게 좋지 않겠니?” 지금은 작고하신 아버지 이용호 선생이 퇴직을 앞두고 신문방송국 행정실장 자리에 돌아온 것이 화근이었다. 사실 김주애는 3학년 1학기까지만 하고 그만둘 생각이었다. 세미나도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조교 선생들이 설악산 밑에서 커다란 수박을 공수해왔다. “주애야, 너 먹이려 사온거야” 그렇게 김주애의 은퇴 계획은 없었던 일이 됐고 2학기 편집장은 그가 됐다.
그렇게 동기들이 모두 떠나고, 김주애만 혼자 남았다. 결정은 혼자 내려야 했고, 욕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신문 제작에는 악역을 맡을 사람이 필요했고, 이제 그 역할은 김주애 차지였다. “마감 왜 안 지켜?”, “언제까지 할 거야?”, “왜 아직도 취재가 안 됐어?”, “이게 최선이야?” 후배들을 다그치며 신문을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15년 뒤, 함께 일했던 후배를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아직도 제 번호를 못 잊겠대요. 내가 왜냐고 물었더니, 예전에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도저히 잊을 수가 없대요. 헤어진 남자친구도 아니고.” 동기 하나 없는 편집장 노릇, 아무튼 쉽지 않았다.
대학주보를 거쳐간 이들은 하나같이 “자기 현역 시절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고됨은 인원의 많고 적음보다는 그 시절을 얼마나 뜨겁게 보냈는가에 따라 갈리는 것이었다. 47기. 책임감만큼은 누구보다 강했다. 겉으론 덤앤더머 같고, “쟤네 머리 비었다”는 소리도 종종 들었지만, 막상 일이 주어지면 그 누구보다 성실했다. 기사 하나 빠질 땐 “그럼 네 얼굴 지면에 크게 나간다?”는 농담이 오갔고, 그 말이 때론 실제보다 더 큰 압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행히, 진짜 얼굴이 실린 적은 없었다. 결국 다 해냈고, 마감은 지켰으며, 신문은 매주 나왔고, 조판은 무사히 끝났다. “지금 누가 그렇게 열심히 뭔가를 할 수 있냐고 물어보면요? 절대 못 할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열정이었다.
지금 47기들은 경찰공무원에서 조경회사 임원으로, 또 약사에서 제약회사 간부 등으로 건강하게 삶을 꾸려가고 있다. 꾸역꾸역 졸업 학점을 메꾼것 치고는 제법 제자리를 찾은 듯 하다. 이유는? 그 시절 몸에 새긴 '책임감'?
이지수 기자 ssu1404@khu.ac.kr
하시언 기자 hse0622@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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