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호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긴 밤 지새우고
불면의 밤이 길어지고 있다. 2024년 12월부터 위헌적이고 불법적인 비상 상황이 100일 넘게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꽃들도 기지개를 펴며 여기저기에서 ‘오늘의 봄’을 알리고 있지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처럼 우리에게 제대로 된 봄은 아직 멀리 있는지도 모른다. 거리에서 더 큰 파국을 막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모이면서 사회대개혁의 목소리가 더 높고 깊고 멀리 퍼지고 있다. 하지만 극단적 언행과 폭력을 선동하는 기득권 세력의 강고한 방호벽은 두텁기만 해서 꿈쩍도 안 할 것처럼 요지부동인 상황이다.
남태령의 풀잎마다 맺힌
2024년 12월 남태령에서의 ‘무박 2일’을 기억한다. 농촌 공동체를 상징하는 트랙터가 용산으로 향하던 길을 경찰버스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 소식이 전파를 탄 이후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응원봉이 빛을 내는 우리 시대의 약자 연대가 시작된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이동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함께 밤을 지새운 뒤 투쟁의 공감대가 형성되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거짓말처럼 길이 열린다. 사실은 처음부터 열려 있었지만 누군가에 의해 차단되었던 길이 중앙 정치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힘없는 약자들의 어깨동무로 다시 열린 셈이다.
진주보다 더 고운 ‘우주 전사’처럼
2025년 1월 한남동에서의 ‘키세스 전사’를 기억한다. 한겨울에 폭설이 내린 도로 한복판에서 하얀 은빛 담요를 방한복인 것마냥 온몸에 둘러싸고 앉아 밤새워 추위와 싸운 사람들의 혹독한 마음에 공감한다. 혹한의 눈보라 속에서도 훼손당한 민주주의의 회복과 그로테스크한 내란 사태의 정상화를 위해 누구보다도 뜨겁게 타올랐을 ‘은박 담요 연대’의 신념을 존중한다. 그날의 영상 속에서 식민지 시기의 독립운동가들과 독재정권 시기의 민주화 투사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망상적 폭력에 맞서 자유롭고 정의로운 새날에 대한 신념 속에 그들은 ‘온몸의 열기’를 발산하며 시대적 냉기를 이겨내고 있었던 셈이다.
▲ 오 교수는 “폭설이 내린 도로 한복판에서 은빛 담요를 방한복인 것마냥 온몸에 둘러싸고 앉아 밤새 추위와 싸운 사람들의 혹독한 마음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일러스트=박서연 기자)
사회대개혁을 향해
탄핵 선고가 이 상황의 끝이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다. 비상계엄 이후 100여 일 동안 벌어진 파시즘적 언행과 폭력의 난무는 한국 사회의 미래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계엄의 선포와 내란의 준동으로 파생된 탄핵 정국의 마무리는 선고 이후 사회대개혁의 신호탄이 되어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2016~17년의 촛불혁명 이후 기대했던 대한민국의 재구조화가 실패한 이후 더욱 강렬하고 절실해진 개혁 열망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제 진짜 아래로부터의 개혁과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공동체적 감수성을 확장하면서 공화정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폭력과 망상의 언어도단을 넘어
우선 언어의 오염을 막아야 한다. 라캉은 언어가 무의식의 조건이라고 말한 바 있고,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규정한 바 있다. 지금 현재 폭력과 혐오를 조장하고 선동하는 오염된 이단의 언어가 개인과 사회 공동체의 무의식에까지 침범하며 존재와 세계를 타락시키고 민주주의의 기능을 폭력적으로 마비시키고 있다. 이제 정화된 언어로 정상성의 세계를 전복시키려는 극단의 의도를 소거해야 한다. 양극단이라는 착시 현상으로 이분법적 양비론을 통해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려는 광기적 언행의 현실 왜곡을 비판하고 새로이 ‘다시 만날 세계’의 평화공동체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완연한 봄에
2025년의 3월은 잔인한 봄이 될 예정이다. 경상도 지역을 강타하고 있는 재난적 산불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도 어김없이 산수유의 노란 자태가 ‘텅 빈 중심’을 선보이고 있으며 팝콘 같은 매화가 하얀 나비를 닮은 형상으로 봄을 선도하고 있다. 경희의 상징인 하얀 목련과 더불어 이제 곧 개나리와 진달래와 벚꽃 등이 앞을 다투며 만화방창(萬化方暢)한 봄의 유혹을 시작할 것이다. 캠퍼스의 봄은 그렇게 캠퍼스 바깥의 비상 상황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계절의 자수를 놓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쯤에서 영화 <1987>의 장면들처럼 캠퍼스의 자유가 질식되었던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폭압적 상황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시절 그때의 봄은 그냥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봄을 마주하려는 피땀 어린 노력과 끈질긴 쟁투 속에 가까스로 조금이나마 기어이 오고야 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이슬의 영롱함을 닮은 사랑의 빛이 당도하길
달콤한 잠이 그립다. 잠이 보약이다. 숙면의 자유와 일상의 회복이 절실하다. 2025년 어느 따뜻한 봄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아련한 기운을 온몸으로 나른하게 체감하며, 그때 비로소 깨어난 듯한 꽃나무들과 초록의 새싹들 속에서 막걸리 한 잔에 추억과 사랑과 청춘을 마시며, 윤동주와 이육사와 김수영을 음미해보고 싶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 밤에도 왜 별이 바람에 스치울 수밖에 없는지, 지금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왜 뿌려야 하는지, 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지 등을 조금이나마 어렴풋하지만 곡진하게 알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봄은 그제야 느지막이 세월호의 아이들과 이태원의 청년들과 더불어 남태령을 넘어 은박지에 새긴 사랑과 함께 올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푸른 하늘을 수놓는 광야의 서시처럼 자유와 정의의 이름으로 빛과 함께 기어이 당도할 것이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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