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70주년
나는 주간교수다② - 이광재(4대 주간교수·정치학)
# 창간 70주년을 맞아 대학주보는 역대 주간 교수를 만나 그들이 겪은 대학과 사회의 현실, 덜 다듬어진 학생기자들을 어루만져온 그 시간을 들어보았다. 故 이규종 교수에 이어 18년간 대학주보에 몸담은 제4대 주간 이광재 교수 이야기다.
1961년 6월, 대학주보 주간 이규종 교수는 문화과(당시 교무처 산하 행정실)에서 타자기를 아주 잘 치는 ‘대학생 이광재’를 발견했다. 함께 근무하던 문화과장과 사무과장, 국문과 동기인 대학주보 기자 여럿이 “우리 국문과 학생인데 저 학생이 고등학생 때 신문·잡지도 만들고 글도 잘 씁니다”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하지만 이광재는 망설였다. 당시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여러 일을 하고 있었기에 학보사 생활에 집중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규종 교수의 설득이 마음 깊이 박혔다. 청년 이광재와 대학주보의 첫 만남이었다.
그렇게 학생 기자로 꼬박 4년을 지냈다. 학생 기자 생활 후, 홍보학과(미디어학과 전신)에서 조교로 대학주보에 관여했다. 그 사이 전임강사를 거쳐 홍보학과 교수도 됐다. 이규종 교수 아래에서 신문방송국 일을 도왔고, 차장직을 거쳐 1974년 1월 주간을 맡게 됐다. 1979년 주간에서 물러나기까지 무려 18년간 대학주보에 몸담은 셈이다.
▲ 이 교수는 “주간을 했던 70년대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졌을지는 몰라도, 유신 헌법으로 정신이 억압받던 고통의 시대였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사진=이지수 기자)
경희 발전 동참한 대학주보
사명과 책임 강조
세상을 음전하게 살아온 깔끔한 지식인의 이미지. 이광재 교수의 첫인상을 21기 박주양(신문방송학 1973) 동문은 이렇게 회고했다. 요즘으로 치면 ‘후마니타스’의 인문 정신이 깃든 외모라는 한 문장도 더했다. 하지만 학생기자를 교육할 때만큼은 차돌같이 단단하게 변모했다.
1973년 5월, 개교 25주년 16면 특집판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매주 4면짜리 신문만 만들어오던 기자들에게는 무려 네 배의 공력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수습 딱지를 겨우 뗀 21기로부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자들은 캠퍼스를 뛰어다녔다. 하지만 이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습기자와 수석기자는 습자지 한 장 차이’라며 매몰차게 독려했다.
이유는 있었다. 대학주보는 당시 학교와 학생의 유일한 의사소통 채널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또한 경희대의 1970년대는 구조적으로 확고한 기틀을 다져가는 경이로운 발전의 시기였다. 단과대 규모 확충, 경희의료원과 국제캠 신설, 입학시험 후기에서 전기 전환 등 일대 변혁이 있었다. 이 교수는 당시 경희의 발전에 동참하며, 사명과 책임을 강조했다. “우리신문은 경희의 얼굴이고 역사다. 사실에 기반해야 하는 신문에 엉터리를 써오면 되겠는가.”
주간과의 갈등에
원고 들고 도망가기도
하지만 일이 터졌다. 1974년 가을, 비판 기사 세 꼭지가 끝내 통과하지 못하고 지면에서 통째로 잘리는 일이 벌어졌다. 기사는 신문제작 과정에서 몇 번의 변신을 겪지만, 이번 건은 너무했다는 게 기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대학주보 창간 이래 최초의 제작 거부가 벌어졌다. 15명 기자 전원이 새벽같이 청량리역에 모여 경기도 가평의 용추계곡으로 떠났다. 속칭 ‘가평 사변’이었다.
기자들은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고 한다. 한참을 놀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는데, 이게 웬걸. 해당 주차의 신문이 발행돼 있었다. 이 교수가 기지를 발휘해 대학주보 OB출신 복학생을 급히 투입해 조판을 마친 것이었다.
이후로도 기자들은 틈만 나면 원고를 들고 도망갔다. 입장 차 때문이었다. 이 교수는 설립자 조영식 박사의 미래 비전에 공감했다. 학교가 나아갈 방향이 분명했기에, 대학주보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반대 의견이 나오면 반론과 함께 시정해 주는 가교역할을 하길 바랐다. 하지만 유신정권 아래 자유와 정의의 가치를 추구했던 학생들은 이 교수의 철학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23기 김희동(신문방송학 1975) 동문이 이 교수를 ‘합리적이었다’고 회상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권위를 이용해 우격다짐으로 기자를 대한 적은 없었다. 대화를 시도했고 수긍시키고자 노력했다.
유신 말기, 학도호국단이 학생회를 대신하게 됐을 때 반유신 운동이 더욱 거세져 대학주보 기자 또한 이에 가담했다. 당시 기자들이 학도호국단을 학도 ‘호구’단으로 부르며, 학교나 정부를 향한 불만도 호구단을 비판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탓에 이 교수는 당황하는 일이 잦았다. 23기 이연철(국어국문학 1976) 동문은 “어느 선은 용납하면서도 더 이상 어느 선은 안 된다 조정하던 모습이 떠오른다”며 이 교수가 짓던 곤란한 표정을 선명히 떠올렸다.
▲ 오늘날의 대학주보를 들고 환하게 웃는 이광재 교수. “앞으로의 대학주보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새로운 방법을 연구해야 해요. 그러면 나름대로 대학주보가 가야 할 방향이 보이지 않겠어요?”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사진=이지수 기자)
고통의 시대
대학주보도 발전 거듭해
주간 시절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학생 보호’였다. 그의 시각에서 사고는 일상이었다. 시위는 빈번했고, 기자들은 ‘적극 가담’ 혐의로 툭하면 청량리 경찰서에 끌려갔다. 대학주보를 감시하는 중앙정보부 요원까지 학교에 상주할 정도였다. 경찰이 “평소 불평등한 사회에 불만을 품던 중 시위에 가담했다”면서 조서를 적으면 이 교수는 하루 반나절을 경찰서에 가서 호소했다. 면회를 가서 구치소 안으로 몰래 빵을 던지고 오는 날도 잦았다.
“주간을 했던 70년대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졌을지는 몰라도, 유신 헌법으로 정신이 억압받던 고통의 시대였어요.” 이 교수는 제한된 범위였더라도, 학생 기자들이 내디딘 민주화의 발걸음이 대학주보의 발전을 점진적으로 이끌었다고 확언한다. 직접 지면에 민주 자유에 관한 목소리가 글로 표현되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23기 김희동(신문방송학 1975) 동문 또한 ‘촛농이 뚝뚝 떨어져서 쌓아 올려진 것이 지난날의 대학주보가 아니었나’고 평했다.
국문과 학생이던 이 교수는 우연한 기회에 들어온 대학주보에서 인생이 바뀌었다. 학생기자 4년을 하고 보니 홍보학과가 신설됐고,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던 이 교수는 언론학으로 논문을 써 홍보학과 교수가 됐다. “새로운 시작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새로워요. 학생들의 언행은 시대의 변화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 교수는 자신을 거쳐 간 학생을 통해 도리어 배운 점도 참 많았다고 한다.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의 마지막 문장인 ‘나는 사람들이 덜 걸어간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는 이 교수가 독자에게도, 대학주보 기자들에게도 건네고 싶은 한 구절이라고 했다. “앞으로의 대학주보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새로운 방법을 연구해야 해요. 그러면 나름대로 대학주보가 가야 할 방향이 보이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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