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70주년 특집
나는 학생기자다② - 대학주보 28기 장창락(국어국문학 1979)
# 창간 70주년을 맞아 우리신문은 60년대 이후 시대별로 대학주보를 지켜온 동문 기자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대학언론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그들의 고민과 기쁨은 무엇이었는지 독자들께서도 함께 하시길 바란다. 지난 호 16기 박종호에 이어 28기 장창락(국어국문학 1979)의 이야기다.
▲ 1980년 봄, 도서관에서 문리대 가는 샛길에 선 필자(왼쪽)와 이상백 동기(오른쪽). (사진=장창락 제공)
1980년 5월 19일, 광주공용버스터미널에서 함평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대학주보 27기 신경준(경영학)의 눈앞에 참혹한 현장이 펼쳐졌다. 그는 ‘함평고구마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당일 새벽 서울을 떠났다. 함평고구마 사건은 1976년, 함평군 단위농협이 고구마 수매약정을 지키지 않아 피해 농민이 단식농성 등 2년여의 거리 투쟁을 벌인 끝에 농협 측의 사과와 보상을 받아낸 일이다.
당시로 돌아가면, 이틀 전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휴교령이 내려졌다. 언제 다시 대학주보를 만들 수 있을까 기약은 없지만, 한국 농민 운동사의 생생한 현장을 다시 열린 교문으로 들어서는 학우에게 전하고 싶었다. 함평으로 가려면 광주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학교 앞 하숙집에서 대학주보 27기 이철우(치본학) 편집장이 취재비를 챙겨주었다.
하지만 기획은 좌절되고 ‘현장’이 나타났다. 그날부터 5월 21일까지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과 이를 탄압하는 군부의 잔학상을 목격한다. 서툴지만 최선을 다해 취재했다. 5월 22일 봉쇄를 뚫고 광주를 벗어난 그는 고향인 경주로 돌아와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유인물을 만든다. 경주와 대구 사이 버스 정류장과 기차역 등지에 은밀하게 진실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져나갔다.
광주 밖에서 광주민주화운동과 군부의 학살을 최초로 알린 이 유인물에 군부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5월 27일 체포된 그는 경주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기소를 기다리던 중, 6월 2일 대구에 있는 계엄사령부 합동조사본부, 태백공사로 불리던 보안사 대구분실로 넘겨진다.
취재수첩을 가슴에 품은 만 스물두 살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시간이 시작됐다. 이미 광주민주화운동은 폭도들의 난동으로 규정됐기에, 신경준의 유인물은 반드시 김대중을 머리로 둔 조직의 선전 선동물이어야 했다. 대구 집에서 연행된 편집장은 신경준에게 지급한 취재비가 사실은 ‘조직’으로부터 받은 공작금이라는 것을 몽둥이찜질 속에 어떻게든 증명해야 했다.
수일에 걸친 구타와 고문이 어떻게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냈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폭력은 그들을 ‘구겨진 신문쪼가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고문의 흔적이 외부에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1개월 이상 외부 접촉을 막은 가운데 신경준은 그해 7월 14일 군사법정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는다.
▲ 1981년 초여름, 신문방송국 앞 4월 학생혁명기념탑 앞의 필자 (사진=장창락 제공)
비슷한 시기에 필자도 도피 중이었다. 1970년대 초반, 민청학련 사건 때 무력화된 전국대학신문기자협회를 재건하자는 움직임이 1979년 말 시작됐다. 서울시 내 14개 대학 학보사 대표가 모여 준비작업을 계속했다. 1980년 4월 3일, 이화여대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김용태 당시 고대신문 편집장(전 국민일보 기자)을 회장으로 선출했다. 언론자유와 군부 퇴진을 외치는 성명서를 끝으로 무력하게 ‘서울의 봄’을 맞이해야 했고 회칙 정비, 지방 대학 연락 등 실무를 담당한 죄로 수배령이 떨어진 것. 한 달쯤 뒤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필자는 비로소 신경준 형의 소식을 들었다.
계엄령은 악마를 연상케 할 만큼 잔인했다. 복역 중이던 신경준은 1980년 11월 삼청교육대로 통칭되는 순화교육대에서 3개월간 치욕스러운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고문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이다. 해를 넘겨 1981년 삼일절 특사로 석방됐으니 그전에 저들은 진실을 외치는 이들의 정신을 부숴 놓으려 한 것이다.
그해 9월, 교문은 다시 열렸다. 하지만 이철우 형과 필자는 대학주보로 돌아가지 못했다. 당시 신문방송국에서 근무했던 대학주보 12기 이용호 선배는, 모두 제적으로 결정 났지만 당시 주간이었던 홍기선 교수가 노력한 끝에 ‘학사경고’로 정리됐다고 생전에 말씀하신 바 있다. 수년 전 우연히 찾아본 학적부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다.
▲ 장 동문이 학생 기자였던 당시 1980년 9월 8일 신문. 5·18 민주화운동 이후 내려진 휴교령이 해제되고 약 3개월 만에 등교가 재개됐다. (사진=대학주보 축쇄판)
필자 같은 심부름꾼까지 제거하려 했을 만큼 폭력 집행자들의 피는 차갑다. 폭력은 산 이를 죽이고, 죽은 이는 더 깊은 어둠 속에 파묻는다. 벗들의 이름을 진술서에 적은 미안함, 미안함을 간직한 이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지 못한 죄책감은 거리에 넘쳤고, 40여 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말없이 소주잔을 나누는 이유가 됐다.
1981년 봄, 미국의 압력으로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대학주보는 서울시청 2층 계엄사 검열단을 통과해야만 윤전기를 돌릴 수 있었다. 민중이라는 단어의 존재 자체가 사회의 안녕질서를 위협하고, 민둥산이라는 시어(詩語)가 권좌의 ‘그분’을 뜻한다는 사실을 푸른 군복의 그들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우리는 폭력에 무릎 꿇은 채 길들고 있는가. 80년대가 다 지나도록 질문은 계속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답을 내놓지 못한다.
40년이 훨씬 더 지난 뒤 우리는 교활하게 진화한 계엄령을 또 경험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운동장에 들어가 진보니, 보수니 하는 구분 아래 나누어 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앞에 선 이들은 진보이고 뒤에 선 이들은 보수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진흙 덩어리 같아서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모순투성이의 존재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음 계엄령이 오기 전에 미리 선택해야 한다. 마음에서 무엇을 꺼낼 것인가. 쉽지는 않겠지만 꼭 80년대보다 훨씬 더 진실하고 강해져서 쇳소리를 낼 줄 아는 용기(勇氣)라야 한다. 그것이 모순에 대한 유일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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