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서울캠퍼스를 읽는 한 방법: 기획, 창의, 조화
2024년은 서울캠퍼스 시대 7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전쟁으로 3년간 피난지 부산에 있다가 회기동을 대학의 새 터전으로 정해 서울로 온 때가 1954년 3월 24일이다. 대학은 1949년에 설립됐지만, 1954년이 되어서야 대학다운 캠퍼스를 처음으로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서울캠퍼스는 지난 70년간 ‘경희’의 ‘경이’로운 성장과 발전을 이끈 터전이자, 경희인의 소중한 시간과 경험을 품고 있는 추억의 공간이 되어주었다. 그런 면에서 서울캠퍼스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하나의 텍스트라 할 수 있으며 서울캠퍼스를 읽고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기획’, ‘창의’, ‘조화’ 정신이 서울캠퍼스를 읽어내는 하나의 방법이다. 공간 구획부터 각종 건물, 조형물의 건설 배경과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기획’, ‘창의’, ‘조화’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기획
우리나라의 많은 대학은 초창기 교사와 그 주변을 중심으로 출발해 점차 확장돼 가는 과정을 밟아 오늘날의 캠퍼스를 형성하였다. 그에 비해 우리의 서울캠퍼스는 처음부터 캠퍼스 규모를 설정하고, 정교한 마스터플랜을 세워 건물, 운동장, 도로, 녹지 등을 배치한 ‘기획된 캠퍼스’다.
이러한 기획캠퍼스는 큰 장점이 있다. 캠퍼스 구성이 매우 체계적이다. 1954년에 마스터플랜을 만들어 공간을 구획하고 건축물을 배치했는데 그림 속의 캠퍼스와 지금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 등용문에서 교시탑을 거쳐 본관에 이르는 우리 대학의 중심축은 마스터플랜과 똑같다.
캠퍼스 동쪽 구역을 구성원의 주된 활동무대로 활용하고, 서쪽 구역은 개발을 최소화해 자연 상태를 유지하려 한 것도 지금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듯 마스터플랜에 따라 개발하다 보니 난개발을 방지하고 건물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캠퍼스를 조성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대학 정신이 캠퍼스 곳곳에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경희는 1953년 피난지 부산에서 교시 ‘문화세계의 창조’를 비롯해 교훈, 교가를 제정했다. 이렇게 초석을 놓은 이념과 비전은 서울캠퍼스 건설사업에 그대로 투영됐다. 대학의 가장 중심되는 교차로에 ‘교시탑’을 세웠다. 본관 삼각형 박공 벽면에는 ‘문화세계의 창조’를 형상화한 부조상을 새기며 캠퍼스 곳곳에 자연 사랑 및 평화의 정신을 담을 수 있었다.
기획: 마스터플랜 (사진=경희기록관 제공)
창의
서울캠퍼스는 놀랍도록 창의적인 발상으로 가득 차 있다. 구릉 사이 푹 파인 지형을 이용해 야외 공연장으로 만든 노천극장, 흐르는 계곡물을 끌어와 만든 선동호, 원형 건물과 기역자 모양 건물을 결합한 중앙도서관, 왕관 모양의 크라운관 등이 대표적이다. 그 중 경희의 창의적 사고가 가장 밝게 빛났던 것은 경희를 상징하는 건물인 본관이다.
1956년 완공된 본관은 당시 우리 대학 재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만큼의 자금과 인원을 동원해 건설한 대역사였다. 본관은 먼 미래에도 경희를 상징하는 건물로 남아야 한다는 원대한 구상이 있었기에, 보는 이들을 압도할 만큼 웅장하고 장엄해야 했다. 그런데 막상 완공을 눈앞에 둔 본관의 위용은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완만한 오르막길 끝에 마주한 본관 건물 뒤로 *천장산(고황산)이 있다 보니 시각적으로 작고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증축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2년의 숙고 끝에 우리는 놀라운 해법을 내놓는다. 본관 앞에 자그마한 분수대를 건설하기로 했던 원래의 계획을 바꾸어 커다란 분수 정원을 만들기로 했다. 본관 앞마당을 건물 너비만큼 원형으로 깊이 파 정원과 분수대를 만들면 시각적으로 건물이 더 높고 크게 보이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건물에는 손 하나 대지 않고 주변 환경을 바꿈으로써 본관의 위용을 바꾸어 놨다. 분수대와 정원은 경관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만 조성된 것이 아니라 건축물의 가치를 변화시킨 창의적 장치였던 셈이다.
창의: 학교 전경 (사진=경희기록관 제공)
조화
서울캠퍼스는 아름답다. 봄이면 온갖 꽃들이 캠퍼스를 수놓고, 여름의 녹음은 짙푸르며, 눈 내린 캠퍼스는 한 폭의 그림 같다.
서울캠퍼스를 보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1954년의 서울캠퍼스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당시 사진을 보면 제대로 된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든 황량한 곳이었다.
서울캠퍼스가 아름다운 공원과도 같은 캠퍼스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심고 가꾸고 보살펴온 정성과 노력 때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연을 가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자연환경이 제대로 빛을 발하려면 건물과 도로 등 인공물이 자연을 압도하지 않아야 한다. 캠퍼스를 조성할 때, 건물을 짓는 와중에도 되도록이면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려 애썼다. 경희의 아름다운 캠퍼스는 돋보이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주변과 어우러지려는 조화의 정신이 잘 지켜졌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조화: 1954년 서울캠퍼스 (사진=경희기록관 제공)
맺으며
캠퍼스 건설사업 바탕에 기획, 창의, 조화의 정신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캠퍼스가 만들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러한 정신이 비단 캠퍼스 건설에만 적용된 것은 아니다. 가장 작고 초라한 대학이었던 경희가 오늘날의 위상을 갖게 된 원동력 역시 기획, 창의, 조화의 정신으로 과업들을 추진해 왔기 때문이다. 기획, 창의, 조화의 정신은 지금도 경희의 역사 속에 깊이 배어 있다.
* 본관 뒤편 산의 원래 이름은 “하늘이 숨겨 놓은 곳”이라는 뜻을 지닌 천장산이다. 우리 학교는 이 산의 모양이 하늘을 나는 봉황과 닮았다고 하여 ‘고황(高凰)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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