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양] 사라지는 것에 소비하는 청춘들 | [우리가 여행을 사는 이유]
새 물건을 살 때의 행복은 며칠만 지나면 무뎌지시지 않으셨나요?
손에 남는 물건은 언젠가 잊혀지지만 내면에 깊이 새겨지는 여행의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죠.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지금 어떤 지워지지 않는 여행이 남아 있나요?
기획 신희재 | tlsgmlwo58@khu.ac.kr
편집 신희재 / 진행 김다희 / 출연 김민서 교수님 / 구성 VOU
도움주신분들 배소영 교수님 이상훈 교수님
[영상 전문]
여러분, ‘경험 소비’라는 말 들어본 적 있나요?
경험 소비는 특별한 기억과 감성적 만족을 얻는 경험에 돈을 쓰는 소비 방식입니다.
이제는 손에 잡히는 물건보다, 무엇을 경험했는지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죠.
전시, 팝업스토어, 원데이 클래스, 다양한 경험 소비 중에서도 지금 2030의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이는 것은 바로 '여행'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여행을 중요한 삶의 일부로 여깁니다. 코로나 19 팬데믹 이후 억눌렸던 발걸음이 이어지면서, 지난해 한국인 해외여행객 수는 약 2,955만 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습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해외로 떠난 셈입니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2%가 '여행이 삶에서 갖는 우선순위가 높다'고 답했습니다. 특히 Z세대는 그 비율이 65.6%에 달하면서, 2030이 여행에 부여하는 의미가 유독 남다른 것으로 나타났죠.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고, 용돈을 아껴서라도 떠나는 이들에게 여행은 이제 사치가 아니라 당연한 소비 항목이 됐습니다.
[권하은 / 체육26]
“근데 방학마다 친구들 보면 여행 간 스토리 올라오고 해가지고 많이 여행 가는 것 같습니다.”
[임바른 / 글커25]
“저는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방학 때 주로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손에 오래 남는 물건 대신 금방 사라져 버리는 여행에 이토록 열광하는 걸까요?
그 답은 물건이 주는 ‘행복의 한계’에서 출발합니다.
심리학자 소냐 류보머스키(Sonja Lyubomirsky)는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으로 이를 설명합니다.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서 원래의 행복이나 불행 수준으로 돌아가는 심리적 현상을 말합니다.
새 물건을 손에 넣는 그 순간 행복은 정점을 찍습니다. 하지만 며칠, 몇 주만 지나면 설렘은 빠르게 무뎌지고 행복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물건도 어느새 '그냥 있는 것'으로 익숙해지는 거죠.
우리는 그것을 '적응'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무뎌짐'에 더 가깝습니다.
반면 여행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여행의 효용은 떠나기 전의 기대, 그곳에서의 경험, 그리고 다녀온 후의 회상으로 세 번 발생합니다.
심리학자 아미트 쿠마르(Amit Kumar)는 우리가 무언가를 소비하고 그 대상을 기다릴 때, 소비의 종류에 따라 '기다림의 질'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새로 산 옷의 배송을 기다릴 때 주로 '대체 언제 오지?' 하는 초조함과 조바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행을 앞두고 있을 때는 초조함 대신 강렬한 '설렘'과 '기쁨'을 느끼죠.
결과가 뻔히 정해져 있는 물건과 달리, 어떤 풍경이 펼쳐지고 누구를 만나게 될지 모르는 낯선 여행을 상상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이미 행복이 된다는 겁니다.
배소영(경희대 문화엔터테인먼트학과) 교수는 “회상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기억의 각색과 재구성”에 주목하며, “여행지에서 예상과 다른 환경을 만나 고생을 하게 될 수 있지만, 다녀온 후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기억은 어느 정도 미화되며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소유할 때 단 한 번의 순간적인 행복만 주는 물건과 달리 경험은 시간을 두고 여러 번 되풀이해서 행복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거죠.
이것이 물건은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여행의 구조입니다.
[김민서 교수님 / 문화엔터테인먼트학과]
“물건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물질적인 소유인 거잖아요. 그렇지만 여행은 사실 나를 중심으로 한 내가 겪고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자아 그 자체를 반영하는 속성이 굉장히 강한 것 같습니다.
돈만 내면 뭔가 동일한 물건들을 모두가 가지게 되는 그런 상황과 달리 이것은 계속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이 이야기를 곱씹고 또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어떤 성격이 굉장히 강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청년들이 다양한 경험 소비 중에서도 여행에 더욱 빠져드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여행이 우리를 일상의 무거운 책임과 역할 속 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인류학에서는 이를 '리미널리티(liminality)', 즉 일상의 문지방을 넘어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했다가 돌아오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여행지’라는 낯선 공간에서 청년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하고 새로운 도전에 부딪히며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게 되는거죠.
[권하은 / 체육26]
“현실에서 벗어나는 기분이라서 그런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도피감.”
[공이랑 / 체육26]
“저는 새로운 것 해보는 걸 좋아해서 여행 가서 좀 새로운 데 보고, 새로운 거 먹고, 하는 거 좋아해서…”
관광학자 닝 왕 (Ning Wang)은 '실존적 진정성(existential authentic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여행을 가면 진정성 있는 경험을 하기 원하죠. 하지만 이 개념이 던지는 진짜 핵심은 따로 있습니다.
‘현지에서 보는 대상이 진짜냐 가짜냐’ 보다, ‘경험하는 동안 내가 얼마나 진짜 나로 존재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거죠.
즉, 진정한 자신에 대한 성찰이 있게 되면 그 여행에서 진정성도 느끼고 만족감을 더 느끼게 되는 겁니다
여행 자체는 며칠 만에 끝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자아와 성찰은 우리들의 내면에 고스란히 남습니다.
[임바른 / 글커25]
“여행을 가면 일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제일 큰 장점인 것 같습니다. 다른 문화와 언어 속에서 새로운 친구들이랑 만나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임유신 / 응수22]
“여행을 가면 일탈하는 느낌도 있어서 또 원래 평소에 있지 않던 자신감도 생기고…”
[김민서 교수님 / 문화엔터테인먼트학과]
“제 생각에는 제 여행의 가장 큰 목표는 저를 좀 발견하는 데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가 되게 힘들 것 같아요.
그리고 ‘기존의 나’라는 어떤 정체성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 같거든요. 나를 옥죄고 있는 어떤 역할이라든지, 어떤 부담감, 이런 것들을 떨치기 어렵기 때문에 여행이라는 어떤 새로운 환경에서 어쩌면 내 인생의 무대라던지 그리고 내 인생의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어떤 관객들, 이런 것들을 바꿈으로써 나에 대해서 조금 더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물건은 남아도 언젠가는 잊혀집니다.
하지만 여행은 사라졌음에도 오히려 오래도록 남습니다.
2030이 소유 대신 경험을 선택하는 이유.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더 오래 더 진심으로 '나'로 남기 위함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머리 속에는 어떤 지워지지 않는 여행이 남아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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