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 민주화운동 46주년을 앞둔 지난 16일 광주에 다녀왔다. 89학번으로 대학에 다녔던 아버지의 ‘광주에 함께 가자’는 말에 젊은 시절을 따라나섰다. 민주화운동을 하며 대학교에서 모르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불러 경찰 눈을 속여 탈출했던 이야기, 그 당시 만난 어머니와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었지만 아주 와닿지는 않았다. 광주에 가자는 제안은 부모님을 더 이해할 기회처럼 느껴졌다. 부모님의 대학 시절을 흔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또 민주주의의 가치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었다.
5·18 민족민주열사 구묘역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다
3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광주는 아주 맑고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쬈다. 우리는 망월동의 5·18 민족민주열사 구묘역에 먼저 들렀다. 그곳엔 아버지가 대학 시절 함께 운동했던 ‘가톨릭평화공동체’ 소속 친구분들이 모여 있었다. 경찰들이 종교시설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성당이나 교회에서 민주화운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구묘역 유영봉안소에는 1980년 이후 돌아가신 호남에 연고를 둔 민족민주열사·희생자들의 유영이 봉안돼 있었다. 1987년 시위 도중 최루탄에 머리를 피격당해 사망했던 이한열 열사 유영도 볼 수 있었다. 과거 아버지와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과 함께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끝까지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그 시절이 지났음에도, 이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아버지와 동료분들의 눈동자가 살아나는 듯했다.
유영봉안소에서 나와 묘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들 바닥에 무언가를 밟고 지나가길래 ‘이게 뭔가’ 했다. 1982년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 부부의 비석을 이곳으로 가져와 파묻어 참배객 발 아래 놓은 것이다. 비석을 밟고 가는데 고소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하나같이 밟고 지나가니 웃기기도 했다.
열사 묘지에서
‘자주경희’ 깃발을 만나다
학교에서 배웠던 박종철, 이한열, 전태일 열사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열사들이 이곳에 계셨다. 탄압에 맞서 분신 항거를 했거나 신군부 세력의 총에 맞고 옥상에서 떨어지는 등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린 고등학생들부터 90대 노인 분들까지 그날 쓰러져간 분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적혀있었다. 열사 묘지에 국화를 놓아드리며 참배하며 목뒤로 느껴지는 뜨거운 태양에 땀이 나고 어지럽기도 했다. ‘46년 전 5월 18일에도 이렇게 더웠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자주경희’ 깃발을 흔들며 가는 경희총민주동문회 (사진=이서현 기자)
당시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대학 민주동문회 깃발이 저마다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학교도 있을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한국외대 동문이 지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학교 민주동문회의 자주색 깃발이 휘날렸다. 인터뷰를 요청드리니 경희총민주동문회 전 회장인 정해랑(국어국문학 1977) 동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대선배님께 5·18민주화운동이 광주에서 일어나기 전과 후의 서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 10만여 명의 대학생이 운집했으나 군부의 무력 진압을 피해 스스로 해산했던 사건을 이야기해 주셨다. 정 동문은 “그때도 계엄이었어. 비상계엄을 확대하면서 휴교령을 때려버렸거든. 그래서 공수부대가 대학에 진주해 있었어”라며 그때를 떠올렸다. “우리학교는 청량리, 서울대면 영등포, 연세대는 신촌에서 모여야 하는데 겁나서 누가 모이겠어... 그걸 뚫고 시위를 한 데가 바로 광주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학교에서도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움직임이 있었다. 학교 대표 6명이 주도한 시위에서 의대 3학년 여학생이 자신의 동맥을 그으면서까지 군부 독재에 맞섰다. 지금 우리가 매일 오가는 문과대 건물 옥상에서도 시위가 이어졌다고 한다. 유인물을 뿌리고 경찰들이 몰려오면 숨고, 밧줄을 타고 건물을 탈출했다. 그 시절의 풍경이 지금 내가 다니는 교정 위로 생생하게 겹치며 신기함이 밀려왔다.
정 동문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뒤 한림원에서 연설했던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다’에서 영감을 받아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것도 물론이며, 반대로 산자가 의롭게 죽은 자를 다시 살린다”고 말했다. 덧붙여 “살아있는 우리는 부끄러워하며 기억하고, 또 아직도 진상 규명이 안 된 일들을 파헤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연하게 누려온 민주주의
윗세대의 피로 쓴 유산
묘지에서 금남로로 이동했다. 이날은 ‘오월 광주, 민주주의 대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광주의 고등학생들, 무안공항 참사 유가족 협회, 공공운수, 금속, 배달플랫폼 등 다양한 노조의 깃발들로 가득했다.

▲ 태극기를 나눠 들고 행진한 광주 고등학생들 (사진=이서현 기자)
1980년 당시 전남대 정문에서 금남로로 향했던 ‘민족민주화성회행진’을 재현하는 ‘민주평화대행진’이 진행됐다. 이곳저곳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저마다의 깃발과 피켓을 들고 전남도청으로 행진했다. 행진을 본 이후엔 전일빌딩에 방문했다. 전일빌딩은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과 함께 시민군이 끝까지 싸웠던 건물이다. 이 건물에 가니 헬기에 의한 총격 흔적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그동안은 민주주의를 그냥 내가 사는 국가의 체제이며 가장 합리적인 체제인 정도로 여기며 살았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역사보다는 현재의 갈등과 혐오를 더 큰 문제로 느끼면서 살았다.
우리 윗세대의 이야기는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로 넘어갔고, 유달리 끈끈해 보이는 부모님을 보며 신기했다. 그런데 이번에 광주에 가면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를 다시 보게 됐다. 지난 12·3 계엄 사태와 박근혜 퇴진 시위 등 내가 자라오면서 본 평화 촛불 시위는 윗세대들의 피로 물들어 만들어진 것을 배웠다. 80년대 무렵 학생들이 주도해 얻어낸 민주주의의 가치가 곧 그 시절 청년들의 가치였다는 점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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