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남기지 않기’는 삶의 필연적인 고통에 관한 성찰이며, 고통의 소멸에 관한 경험적 지혜이다. (사진=픽사베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는 마음 수행에 관한 기록이다. 저자 아잔 브람(Ajahn Brahm)은 영국인 승려로서 가난한 노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17세에 불교의 선(禪) 수행 서적을 읽고 삶에 관한 성찰을 시작한 후 출가 수행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현재 교황 프란치스코, 달라이 라마와 함께 현존하는 영적 스승으로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선이란 ‘고요’를 의미한다. 특히 마음의 고요함과 평정심을 뜻한다. 선 수행의 전통은 불교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유대교의 하시디즘(Hasidism), 기독교의 고대 사막 수행자 전통, 이슬람 수피즘(Sufism), 유교의 좌망(坐忘) 수행에도 유사성이 있다. 이 중에서도 불교의 선 수행은 마음에 관한 철학적 원리와 심리학적 통찰을 심층적으로 연구해 온 전통이다.
아잔 브람이 강조하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는 삶의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필연적인 고통에 관한 성찰이며, 고통의 소멸에 관한 경험적 지혜를 소개하고 있다. 삶은 왜 이리 고통스러운가? 그것은 인간의 끝없는 ‘갈애’(渴愛) 때문이다. 갈애의 근본 원인은 ‘집착’이다. 집착은 대상을 달리하며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면 존재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혜안을 상실한다. 한 예로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를 집착의 대상으로 삼는 이는 사람을 지위에 따라 판단한다. 경제적 부를 집착의 대상으로 삼는 이는 물질의 기준으로 판단한다. 자아를 집착의 대상으로 삼는 이는 타인의 시선만을 의식해서 삶을 산다. 집착하는 사람은 타인의 칭찬과 비판에 항상 마음이 흔들린다. 이는 정견(正見)을 상실한 중생의 마음이다. 인간은 봄에 피는 개나리를 보면서 개나리가 노란색인 사실에 시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사람의 ‘다름’을 보면서 즉각적인 분별심을 일으키고 판단한다. ‘다름’이 곧 ‘차별’이 되는 순간이다. 이는 관계성 속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자아 중심적인 ‘비교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삶은 늘 피곤하고 괴롭다. 선 수행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마음 상태를 ‘마야’라고 부른다. 사실이 왜곡된 망상에 가까운 마음 작용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야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잔 브람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아잔 브람은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a)의 명상 수행을 제시한다. 사마타는 ‘고요한 마음으로 머무는 상태’를 뜻한다. 위빠사나는 ‘스스로의 상태에 거리를 두고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명상이라고 하면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좌선하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진정한 명상은 ‘매 순간 고요히 머물며 스스로 깨어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이는 특정 자세와 상관없이 평범한 일상의 삶 속에서 언제나 지속 가능한 마음의 평정심을 뜻한다. 서양의 고대 그리스철학에서는 이를 ‘절대 평정’을 의미하는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불렀으며 최고의 지성을 갖춘 현인의 특징으로 이해한다.
마음의 고요를 경험했다면 그것은 ‘선정’(禪定)을 체험한 것이다. 선정은 일회성이 아니라 다층적인 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첫째, ‘초선’(初禪)의 단계이다. 이는 감각기관을 고요히 하여 깊은 사유와 고찰로 불선법(不善法)을 멀리 여위는 과정에서 느끼는 기쁨의 단계이다. 둘째, 제2선의 단계이다. 이는 사유와 고찰을 가라앉히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을 느끼는 단계이다. 셋째, 제3선의 단계이다. 이는 희열의 빛이 소멸하고 평온하게 머물며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에서 오는 고요함의 단계이다. 넷째, 제4선의 단계이다. 이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려 기쁨과 슬픔이 온전히 소멸함에서 오는 ‘불고불락’(不苦不樂)의 공(空)의 마음이다. 비움의 마음은 중도(中道)의 삶으로 인도한다.
중도의 삶은 양극단인 영원주의의 상주론(常住論)과 허무주의의 단멸론(斷滅論)을 초월하여 ‘지금 여기’에 고요히 머물며 항상 깨어있는 삶이다. 현재에 머문다는 것은 과거를 말려버리는 것이며, 미래에 관한 망상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과거에 집착해서 후회하거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하게 보낸다. 선 수행의 관점에서 이는 가장 어리석은 존재 방식이다.
아상(我想)이 소멸한 순수의식의 무심(無心)은 깨달은 자, 아라한의 마음이다. 아라한은 느낌으로서의 기쁨, 번뇌, 행복은 조건에 의지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기적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통찰한다. 인간은 행복에 집착하지만 사실 행복이라는 느낌 속에는 이미 괴로움의 감정이 내재해 있다. 행복과 불행은 단지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무수한 생멸의 반복 현상 중 하나일 뿐이다. 마음의 고요는 삶의 근원적인 원리인 무상, 무아, 고통의 이치를 깨달아 모든 번뇌의 적멸을 통해 멸진정(滅盡定)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는 자아변혁으로 안내한다. 아잔 브람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세상과 관계하는 자기 자신을 먼저 변화시킬 것을 강조한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아잔 브람은 진정한 선 수행의 성지는 붓다가 태어나고 깨닫고 열반에 들었던 룸비니, 보드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르의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고요와 평정을 경험하는 초선, 제2선, 제3선, 제4선의 사선정(四禪定)임을 강조한다. 선정을 경험한 우리의 마음이 곧 붓다의 마음이다. 붓다란 ‘항상 깨어있는 자’이다. “도반이여, 나는 번뇌가 다 했고, 삶을 완성했고, 할 바를 다했고, 짐을 내려놓았고, 존재의 족쇄를 끊고, 바른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입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1
- 2
- 3




